영국 퇴직연금 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이하:NEST) 모델 혁신 사례 분석과 한국형 제도 도입의 시사점은 노후 준비를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많은 직장인이 낮은 수익률과 복잡한 관리 체계로 인해 퇴직연금이 과연 노후를 책임질 수 있을지 깊은 의구심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영국의 성공적인 NEST 모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독자분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실질적인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퇴직연금 위기와 NEST 탄생 배경
영국은 2000년대 초반, 급격한 고령화와 함께 개인들의 저축률 하락이라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연금 체계는 국가 연금(State Pension)과 기업 연금(Occupational Pension)으로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소기업 근로자나 저소득층은 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잡한 가입 절차와 높은 수수료 때문에 연금 가입을 기피했고, 이는 국가적인 노후 빈곤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002년 ‘연금 위원회(Pension Commission)’를 설립하고 아데어 터너(Adair Turner) 경을 의장으로 임명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위원회는 3년간의 심층 연구 끝에 ‘자동 가입(Automatic Enrolment)’ 제도와 이를 뒷받침할 공공 중심의 연금 기금인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 설립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행동 경제학의 ‘넛지(Nudge)’ 이론을 공공 정책에 과감하게 도입한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자동 가입 제도의 마법과 행동 경제학의 적용
NEST 모델의 가장 핵심적인 동력은 바로 ‘자동 가입(Automatic Enrolment)’ 제도에 있습니다. 이전의 연금 제도는 가입자가 스스로 신청해야 하는 ‘옵트인(Opt-in)’ 방식이었으나, NEST는 특별한 거부 의사가 없는 한 모든 근로자가 자동으로 가입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게으름이나 미루는 습성을 오히려 저축으로 연결하는 고도의 전략이었습니다.
근로자가 직장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연금에 가입되고, 급여의 일정 비율이 적립됩니다. 만약 탈퇴하고 싶다면 본인이 직접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러한 번거로움이 오히려 가입 유지율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이 제도가 시행된 이후 연금 가입률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초기에는 가입을 강제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사용자(고용주)의 기여금과 정부의 세제 혜택이 더해지면서 근로자들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NEST 모델의 핵심 운영 체계와 구조적 특징
NEST는 영국 정부가 설립했으나 운영은 독립적인 수탁 법인(NEST Corporation)이 담당하는 독특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기금을 보호하면서도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NEST는 영리 목적의 일반 보험사나 자산운용사와 달리,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비영리 추구’ 원칙을 고수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 절감입니다. NEST는 수백만 명의 가입자를 단일 플랫폼으로 관리함으로써 운영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습니다. 가입자에게 부과되는 수수료는 연간 관리비(AMC) 0.3%와 적립금 투입 시 1.8%의 기여금 수수료로 구성되는데, 이는 민간 연금 상품에 비해 매우 저렴한 수준입니다. 특히 저소득층과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들에게 이러한 저비용 구조는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타겟 데이트 펀드(TDF) 중심의 자산 운용 전략
NEST의 자산 운용은 가입자의 생애 주기에 맞춘 ‘타겟 데이트 펀드(Target Date Fund, TDF)’를 기본으로 합니다.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도, NEST는 가입자의 예상 은퇴 시점에 맞춰 위험 자산과 안전 자산의 비중을 자동으로 조절합니다. 이는 금융 지식이 부족한 일반 근로자들이 자산 배분 실패로 인해 노후 자금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합니다.
NEST의 TDF는 크게 세 단계의 생애 주기별 전략을 따릅니다.
기초 단계(Foundation Phase): 젊은 층을 대상으로 초기 적립금이 손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운영하며 저축 습관을 기릅니다.
성장 단계(Growth Phase): 은퇴까지 기간이 많이 남은 가입자를 위해 주식 등 위험 자산 비중을 높여 수익률을 극대화합니다.
공고화 단계(Consolidation Phase): 은퇴가 임박한 시점으로, 자산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채권 및 현금성 자산 비중을 높여 안정성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운용 덕분에 NEST는 시장 변동성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기록하며 가입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NEST가 가져온 가시적인 성과
영국 노동연금부(DWP)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2년 자동 가입 제도 도입 이후 영국의 사적 연금 가입자 수는 1,000만 명 이상 증가했습니다. 특히 NEST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가입자를 보유한 기금으로 성장했습니다. 2024년 기준 NEST의 관리 자산은 수천억 파운드에 달하며, 가입자 수는 1,2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영국 전체 근로자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주목할 점은 저소득층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참여율입니다. 과거 이들의 연금 가입률은 20% 미만이었으나, NEST 도입 이후 80% 이상으로 급증했습니다. 또한, 기여금 수준도 단계적으로 인상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총 2%(근로자 1%, 고용주 1%)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총 8%(근로자 4%, 고용주 3%, 정부 세제 혜택 1%) 수준으로 안착했습니다. 이러한 점진적 인상 전략은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노후 자금을 충분히 확보하게 만든 핵심 성공 요인으로 꼽힙니다.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
한국의 퇴직연금 제도는 DB(확정급여형), DC(확정기여형), IRP(개인형 퇴직연금)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으나, 여전히 낮은 수익률과 원리금 보장 상품 위주의 운용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있습니다. 특히 대다수의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방치하고 있어 실질적인 노후 대비 기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영국의 NEST 모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왜 한국은 공공 성격의 거대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가입니다. 현재 한국은 금융기관들이 개별적으로 연금을 관리하다 보니 수수료는 높고 전문적인 자산 배분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NEST처럼 대규모 자금을 통합 운용하여 비용을 낮추고 전문성을 높이는 ‘기금형 제도’의 도입이 시급합니다.
둘째,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실효성 문제입니다. 한국도 최근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으나, 여전히 선택의 폭이 좁고 홍보가 부족합니다. 영국의 자동 가입 제도처럼 강력한 ‘넛지’를 적용하여 가입자가 고민하지 않아도 최적의 운용이 이루어지도록 시스템을 보완해야 합니다.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한 구체적 제언
한국판 NEST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필요합니다. 먼저, 중소기업 근로자들을 위한 ‘공적 퇴직연금 기금’을 설립해야 합니다. 대기업은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더라도, 자산 운용 역량이 부족한 소규모 사업장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전문 기금에 위탁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또한, 자산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NEST처럼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수탁 위원회를 운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고, 가입자의 수익률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배구조를 확립해야 합니다. 더불어 한국형 TDF 상품의 고도화를 통해 생애 주기에 따른 정밀한 자산 배분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수익률을 높이는 것을 넘어, 국민들이 퇴직연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산’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지속 가능한 노후를 위한 NEST 모델의 교훈
영국의 NEST 모델은 단순한 금융 상품이 아니라 사회 보장 제도의 혁신입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는 시대에 국민 스스로가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설계해 준 사례입니다. NEST의 성공은 “시스템이 인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사회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퇴직연금 체계를 방치한다면 미래 세대의 부양 부담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영국의 NEST가 보여준 저비용 구조, 자동 가입의 마법, 그리고 생애 주기별 전문 운용은 우리가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지표입니다. 이제는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형 NEST’를 구체화하여, 모든 근로자가 소외되지 않고 안정적인 노후를 꿈꿀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때입니다.
NEST의 성공 뒤에는 끊임없는 가입자와의 소통이 있었습니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쉽게 자신의 자산을 확인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사용자 경험(UX)의 혁신 역시 NEST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참고자료
NEST Corporation, “NEST Annual Report and Accounts 2023/24”, https://www.nestpensions.org.uk
UK Department for Work and Pensions (DWP), “Automatic Enrolment Evaluation Report 2023”, https://www.gov.uk/
OECD, “Pensions at a Glance 2023: OECD and G20 Indicators“, https://www.oecd.org/
Pension Commission UK, “A New Pension Settlement for the North: The Turner Report”, https://www.gov.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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