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도입 이후 2%대의 낮은 수익률로 방치되던 퇴직연금 제도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과 전면 의무화라는 20년 만의 대수술을 통해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노사정 합의는 단순한 제도 변경을 넘어 중소기업 근로자의 수급권 보호와 노후 자산 증식을 위한 기금화 전략이 핵심인 만큼, 구체적인 운영 방식과 기대 효과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본 글에서는 퇴직연금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새롭게 도입되는 기금형 연금의 메커니즘과 예상 수익률 변화를 심층적으로 다루어 여러분의 궁금증을 명쾌하게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현주소와 구조적 한계
2005년,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야심 차게 출발했던 퇴직연금 제도는 어느덧 성년의 나이인 20년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근로자들에게 퇴직연금은 ‘노후 자금’이라기보다 퇴직 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목돈’ 혹은 ‘방치된 예금’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개혁이 논의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이러한 구조적 한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쥐꼬리’ 수익률, 왜 2%대에 머물렀나?
가장 뼈아픈 지적은 바로 수익률입니다. 지난 수년 건 고금리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1~2%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 수익률은 마이너스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그 원인은 현재의 ‘계약형’ 구조에 기인합니다.
현행 제도 하에서는 기업이 개별 금융기관(은행, 증권, 보험사)과 계약을 맺고, 근로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거나(DC형), 회사가 운용(DB형)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입자는 금융 지식이 부족하거나 무관심하여, 원리금 보장형 상품(예·적금)에 자산을 묶어두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금융사 입장에서도 적극적인 운용보다는 수수료 수익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산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본 시장의 성장을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입니다[1].
중소기업 가입률 저조와 임금체불의 악순환
또 다른 문제는 사각지대입니다. 대기업의 경우 퇴직연금 도입률이 높지만, 30인 미만 중소기업의 도입률은 2024년 기준 전체 대상 사업장의 26.5%에 불과합니다[2]. 이는 곧 근로자의 수급권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회사가 도산하거나 경영이 악화되었을 때,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근로자는 퇴직금을 떼일 위험에 처합니다. 실제로 전체 임금체불액의 약 40%가 퇴직금 체불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통계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퇴직급여가 사내에 유보되어 있거나, 운영 자금으로 전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면 의무화 조치는 이러한 ‘임금체불’의 고리를 끊고, 모든 근로자가 공평하게 노후 안전판을 확보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의 핵심 구조와 운영 메커니즘
이번 2월 6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퇴직연금 기능강화를 위한 노사정 태스크포스(TF)’가 합의한 내용의 핵심은 ‘기금형 연금’의 도입입니다. 이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는 변화입니다.
계약형 vs 기금형: 무엇이 달라지는가?
기존의 ‘계약형’은 기업과 금융사가 1:1로 계약을 맺는 구조였습니다. 반면, ‘기금형’은 회사와 독립된 별도의 수탁법인(기금)을 설립하고, 이 기금이 노사 및 전문가로 구성된 이사회의 통제 하에 자산을 운용하는 방식입니다.
구분 계약형 (현행) 기금형 (도입 예정)
운용 주체 사용자(DB) 또는 가입자(DC) 수탁법인 (기금 이사회)
의사 결정 개별적, 비전문적 집단적, 전문가 참여
운용 방식 개별 금융기관 상품 가입 자산운용 정책(IPS)에 따른 포트폴리오 투자
장점 절차 간편 수익률 제고, 수급권 보호 강화
가장 큰 차이점은 ‘전문성’과 ‘규모의 경제’입니다. 기금형 제도에서는 여러 중소기업의 적립금을 한데 모아 거대한 기금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국민연금처럼 다양한 자산(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에 분산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연합형 기금’을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
이번 합의에서 주목할 점은 개별 기업이 기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이 연합하여 기금을 만드는 형태를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이 단독으로 기금 법인을 설립하고 전문가를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국민연금공단과 같은 공공기관이나 대형 민간 금융사가 주체가 되어 ‘중소기업 연합형 기금’을 조성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수많은 중소기업의 퇴직금을 하나의 큰 펀드처럼 묶어서(Pooling) 운용하면, 운용 보수를 낮출 수 있고 소액으로는 접근하기 힘들었던 우량 대체투자 자산(부동산, 인프라 등)에도 투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곧 수익률 상승의 기폭제가 될 것입니다.
해외 사례로 본 기금형 연금의 성공 모델과 시사점
한국이 가려는 길은 이미 연금 선진국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특히 이번 합의에서 언급된 호주와 영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해 줍니다.
호주 퇴직연금(Superannuation)의 성공 비결
호주의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모델로 꼽힙니다. 호주는 기금형 제도를 통해 연평균 7~9%대의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3]. 그 비결은 바로 ‘디폴트 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과 강력한 ‘기금 거버넌스’에 있습니다.
호주의 기금은 노조와 사용자 단체가 동수로 추천한 이사들이 운영에 참여하며, 철저하게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탁자 의무(Fiduciary Duty)를 집행합니다. 전문적인 자산운용사를 선정하여 경쟁을 유도하고, 수익률이 저조한 기금은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다른 기금에 흡수되도록 하는 강력한 성과 평가 시스템이 작동합니다. 한국의 기금형 연금 역시 이러한 ‘무한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여 수익률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영국 NEST 모델과 한국형 적용 방안
영국은 2012년부터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 자동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영세 사업장을 위해 정부 주도로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라는 공적 성격의 기금을 설립했습니다. 민간 금융사들이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저임금 근로자와 소규모 사업장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모델입니다.
한국 역시 이번 합의를 통해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제도(푸른씨앗 등)를 확대 개편하여 한국형 NEST를 구축할 것으로 보입니다. 공공기관이 운용을 주도하거나 관리 감독을 강화함으로써, 수수료는 낮추고 안정성은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될 것입니다. 이는 민간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전면 의무화가 가져올 파급 효과와 예상 수익률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사업장에 대한 퇴직연금 가입 의무화는 노동 시장과 금융 시장 양쪽에 거대한 파장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30인 이하 사업장 의무화와 체불 임금 해소
현재 30인 이하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사업주의 자금 부담과 행정적 번거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의무화 조치는 단계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며, 이를 안착시키기 위해 정부는 재정적 지원(운용 수수료 지원, 사용자 부담금 일부 보조 등)을 확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즉각적인 효과는 임금 체불 감소입니다. 퇴직금이 매달 또는 매년 외부 금융기관(기금)에 적립되므로, 회사가 망하더라도 근로자의 퇴직금은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이는 근로자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로, 사회적 안전망이 한층 두터워지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기금화 전환 시 기대되는 수익률 시뮬레이션
그렇다면 실제로 수익률은 얼마나 오를 수 있을까요? 금융 전문가들은 기금형 제도가 제대로 정착된다면, 현재의 2%대 수익률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4~5%대, 공격적으로 운용 시 6% 이상으로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합니다.
현재 1,000조 원에 육박하는 유동 자금이 퇴직연금 시장으로 유입되어 자본 시장의 장기 투자 자금으로 전환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월 30만 원씩 30년을 납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수익률이 2%일 때와 5%일 때의 최종 수령액 차이는 거의 두 배에 가깝습니다. 복리의 마법이 기금형 제도를 통해 비로소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제도 안착을 위한 과제와 근로자의 대응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지배구조(Governance)의 독립성 확보
기금형 제도의 핵심은 ‘누가 돈을 굴리는가’입니다. 기금 이사회가 사용자의 입김에 휘둘리거나, 전문성이 없는 낙하산 인사로 채워진다면 제2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법적으로 강력하게 보장하고, 운용 성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투명한 시스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노사정이 합의한 만큼, 근로자 대표가 기금 운용 감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금융 이해력 향상과 포트폴리오 점검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가입자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근로자는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떤 기금에서,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이제는 ‘원금 보장’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위험 관리 하의 투자’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30인 이하 사업장 근로자라면 향후 회사가 가입할 기금형 연금의 운용 실적을 꼼꼼히 따져보고, 필요하다면 개인형 퇴직연금(IRP)을 추가로 활용하여 부족한 노후 자금을 보완하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결론 및 요약
2026년 2월 6일 발표된 노사정 합의는 한국 퇴직연금 역사의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기금형 연금 도입과 전면 의무화는 ① ‘쥐꼬리 수익률’ 탈피를 통한 노후 소득 증대, ② 중소기업 근로자의 임금 체불 공포 해소, ③ 자본 시장 활성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필수적인 선택입니다.
물론 제도의 전환 과정에서 중소기업 사업주의 부담 완화 방안과 기금 운용의 투명성 확보라는 과제는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퇴직연금이 더 이상 방치되는 돈이 아니라, 내 노후를 책임질 든든한 버팀목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자신의 퇴직연금 현황을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다가올 기금형 연금 시대, 준비된 자만이 그 과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인용 및 참고자료 출처
[1] 고용노동부 및 금융감독원, “2023년도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 2024.
[2] ASFA (The Association of Superannuation Funds of Australia), “Superannuation Statistics”, 2025, https://www.smsfassoci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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