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 이야기

EP.3 LTCM이 남긴 뼈아픈 금융의 교훈: 신화의 붕괴와 천재들의 몰락

현대 금융 공학의 정점이라 불리던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의 몰락은 단순히 한 헤지펀드의 파산을 넘어선 사건이었습니다.

이 금융 사건은 인간의 지성이 오만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1998년 여름부터 시작된 이들의 비극은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이번 마지막 시리즈에서는 철옹성 같던 LTCM의 수학적 요새가 어떻게 단 몇 주 만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는지, 그 처절한 몰락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예고되지 않은 폭풍: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충격

1998년 8월 17일, 러시아 정부는 자국 통화인 루블화의 가치를 34%나 절하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채무 지불 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습니다.

이는 LTCM의 정교한 모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들의 데이터에 따르면 러시아와 같은 핵강국이 파산할 확률은 통계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디폴트는 전 세계 투자자들을 극심한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시장 참여자들은 앞다투어 신흥국 자산과 위험 자산을 팔아치우고 안전 자산인 미국 국채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안전자산으로의 도피(Flight to Quality)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LTCM이 그토록 신봉하던 수렴 거래는 이 시점에서 완전히 반대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좁혀져야 할 가격 차이(스프레드)가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LTCM은 러시아 국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시장에 포지션을 걸어두었기에 안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시장에서는 모든 자산 간의 상관관계가 1로 수렴했습니다.

즉, 분산 투자 효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포지션에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재들의 모델은 비이성적인 인간의 공포를 변수에 넣지 않았던 것입니다.


레버리지의 역습: 증폭기에서 파멸의 도구로

영광의 시절 수익을 극대화해주었던 레버리지는 몰락의 순간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LTCM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당시 LTCM의 부채 비율은 자기자본 대비 최소 25배에서 최대 100배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자산 가치가 단 1%만 하락해도 자본금의 25~100%가 날아가는 구조였습니다.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평소 우호적이었던 대형 은행들은 즉각 태세를 전환했습니다.

그들은 LTCM에 추가 증거금(마진콜)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현금이 바닥난 LTCM은 증거금을 메우기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우량 자산들을 헐값에 매각해야 했습니다.

이는 다시 해당 자산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추가 손실을 부르는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를 만들어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LTCM의 포지션이 시장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이에나 같은 트레이더들은 LTCM이 강제로 자산을 매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보유한 종목을 미리 공매도하여 가격 하락을 부채질했습니다.

천재들의 오만이 시장의 동료들을 적으로 돌린 결과였습니다.

한때 월가의 정점이었던 이들은 이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연준의 개입: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긴급 수혈

1998년 9월 초, LTCM의 자본금은 연초 대비 90% 이상 증발했습니다.

한때 50억 달러에 육박하던 자산은 이제 4억 달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LTCM의 파산이 그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전 세계 주요 투자은행들이 LTCM과 수조 달러 규모의 파생상품 계약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LTCM이 공식적으로 파산한다면, 전 세계 금융 거래의 연쇄 부도가 발생할 것이 불 보듯 뻔했습니다.

이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뉴욕 연준 총재 윌리엄 맥도너는 월가의 거물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습니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메릴린치 등 14개 대형 금융기관 수장들이 모여 LTCM을 구제하기 위한 36억 달러 규모의 긴급 자금 투입에 합의했습니다.

이는 민간 기업의 파산에 중앙은행이 개입한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회자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결국 LTCM은 외부 자금 수혈로 간신히 즉각적인 파산은 면했지만, 경영권은 채권단에게 넘어갔고 파트너들의 명성과 재산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름은 이제 성공의 상징이 아닌 실패의 반성문에 적히게 되었습니다.


천재들의 사후: 모델이 놓친 것들에 대하여

LTCM의 몰락 이후 마이런 숄즈와 로버트 머턴은 학계와 업계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설계한 모델은 정규분포를 가정하고 있었지만, 실제 금융 시장의 수익률 분포는 양 끝단이 두꺼운 뚱뚱한 꼬리(Fat Tail)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즉, 이론상 수억 년에 한 번 일어날 법한 일이 현실에서는 수십 년에 한 번꼴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리스크 관리에 대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단순히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확률 계산만으로는 예측 불가능한 블랙 스완에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똑똑한 개인이라 할지라도 시장 전체의 광기와 공포를 이길 수 없다는 겸손함을 금융권에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LTCM의 파트너들은 이후 각기 다른 이름의 헤지펀드를 다시 설립하거나 자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지적 유희는 한 번의 거대한 실패로도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현대 금융 공학의 정교함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시스템적 위험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지식과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금융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졌지만, 시장의 불확실성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지혜는 부족했습니다.

모델은 현실의 복제품일 뿐,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부정했을 때, 그들의 몰락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알고리즘 매매와 AI 투자 시대에도 LTCM의 사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무리 발전된 기술이라도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존재하며, 극단적인 상황에서 시스템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수학 공식이 아닌 신뢰와 유동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천재들의 화려했던 실패는 지금도 전 세계 트레이더들의 모니터 뒤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EP2. 황금기 보러가기


참고자료 

Nassim Nicholas Taleb, “Fooled by Randomness: The Hidden Role of Chance in Life and in the Markets”, Texere, 2001.

로저 로웬스타인, “천재들의 실패(When Genius Failed)”, 승산, 2008.

Ben S. Bernanke, “The Courage to Act: A Memoir of a Crisis and Its Aftermath”, W. W. Norton & Company, 2015.

“The Long-Term Capital Management Crisis of 1998”, The Balance, https://www.thebalancemone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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