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교과서의 첫 장을 넘기면 우리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리면 시중 금리도 따라서 내려간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금융 시장의 현실은 이 오래된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경기 부양과 물가 안정을 위해 2024년 하반기부터 기준금리 인하 사이클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지표가 되는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오히려 맹렬한 기세로 상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기준금리를 올려도 장기 금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두고 ‘수수께끼(Conundrum)’라 불렀던 상황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이른바 ‘역그린스펀의 수수께끼’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시장은 연준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것일까요?
단순히 일시적인 수급의 불일치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2000년대 중반 전 세계를 당혹게 했던 원조 ‘그린스펀의 수수께끼’와 2025년 현재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금리 역주행’ 현상을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특히 미국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국채 공급 과잉,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채권 시장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왜곡시키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 보겠습니다.
투자자로서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시그널 속에서 어떤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할지,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2000년대의 미스터리
금리 인상에도 꿈쩍 않던 장기 금리의 비밀
시계바늘을 20여 년 전으로 되돌려 보겠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 사이, 미국 연준은 과열되는 경기를 식히기 위해 기준금리를 1.0%에서 5.25%까지 공격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상식적이라면 장기 국채 금리 또한 이에 발맞춰 상승 곡선을 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10년물 국채 금리는 4%대에서 하락하거나 횡보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이를 두고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토로했지만, 훗날 밝혀진 그 원인은 ‘글로벌 과잉 저축(Global Saving Glut)‘에 있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무역 흑자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 매입에 쏟아부으면서, 연준의 긴축 정책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한 채권 수요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수수께끼는 ‘넘쳐나는 돈’이 문제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저축이 투자보다 많았고, 이 유동성이 미국 채권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장기 금리를 인위적으로 눌러놓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기지 금리 하락을 유도해 미국 주택 시장의 거품을 키웠고, 2008년 금융위기라는 파국을 초래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시장의 수급 요인이나 글로벌 자금 흐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025년 오늘, 우리는 그와 유사하지만 방향은 정반대인 또 다른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채권을 사려는 자’들이 금리를 끌어내렸다면, 지금은 ‘채권을 팔려는 자’들이 금리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2025년의 역설
금리 인하에도 치솟는 장기 금리와 공급 과잉
2024년 9월, 미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혔다는 판단하에 ‘빅컷(0.5%p 금리 인하)’을 단행하며 통화 완화 정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습니다.
시장은 환호했고,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금리가 내려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2025년으로 접어든 현재,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금리의 벤치마크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오히려 전저점 대비 1%포인트 가까이 급등하며 4% 중반을 훌쩍 넘어서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역 그린스펀의 수수께끼’ 혹은 ‘베어 스티프닝(Bear Steepening,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보다 더 빨리 오르며 수익률 곡선이 가파라지는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은 ‘글로벌 과잉 공급’에 있습니다.
과거 그린스펀 시절이 ‘저축의 과잉’이었다면, 지금은 미국 정부가 찍어내는 ‘국채의 과잉’이 문제입니다.
미국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천문학적인 재정 지출을 이어오고 있으며, 2025년에도 ‘트럼프 트레이드’ 등으로 대변되는 확장 재정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트럼프는 왜 금리 인하를 갈망할까? 저금리 선호의 경제학
세수는 부족한데 돈 쓸 곳은 많으니, 정부는 빚을 내기 위해 국채를 찍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에 국채 물량이 쏟아져 나오니 채권 가격은 똥값이 되고, 반대로 채권 금리는 치솟는 것입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려 단기적인 자금 조달 비용을 줄여주려 해도, 장기적으로 쏟아질 국채 물량에 대한 공포가 시장 금리를 밀어 올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인플레이션 고착화 우려와 텀 프리미엄의 부활이 만드는 공포
단순히 물량 부담만으로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 기저에는 ‘인플레이션이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연준은 물가가 2%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시장은 탈세계화, 공급망 재편, 인건비 상승 등 구조적인 인플레이션 요인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봅니다.
만약 연준이 섣불리 금리를 내렸다가 인플레이션 불씨가 되살아난다면, 장기 채권을 보유한 투자자들은 앉아서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작동하면서, 투자자들은 장기 채권을 보유하는 대가로 더 높은 이자, 즉 ‘텀 프리미엄(Term Premium)‘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이 텀 프리미엄이 거의 제로에 가깝거나 마이너스였습니다.
경제가 안정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5년의 투자자들은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미국 정부의 부채가 감당 불가능한 수준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한 유가 급등 가능성 등이 텀 프리미엄을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텀 프리미엄의 부활은 곧 장기 금리의 상승을 의미하며, 이는 연준의 통화 정책 효과를 반감시키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기준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기업들이 투자를 위해 빌리는 장기 대출 금리나 가계의 주택 담보 대출 금리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경기 부양 효과는 요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 연준 3회 연속 금리 인하와 ‘충분한 공급’ 정책: 글로벌 시장 반응과 투자 전략
서민 경제를 위협하는 모기지 금리 상승과 기업 투자의 위축
이러한 ‘역 수수께끼’ 현상은 실물 경제, 특히 서민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30년 고정 모기지 금리는 10년물 국채 금리에 연동되어 움직입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렸다는 뉴스만 보고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간 사람들은, 오히려 오른 금리에 당황하며 발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주택 구매 수요가 위축되면서 부동산 시장의 거래 절벽이 심화될 우려가 있으며, 이는 건설 경기 침체와 내수 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채 금리가 국채 금리에 가산 금리를 얹어 결정되는 구조인 만큼, 국채 금리 상승은 곧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 증가를 의미합니다.
특히 2025년은 많은 기업이 과거 저금리 시절 빌렸던 부채의 만기가 돌아오는 시기입니다.
이들은 이제 훨씬 더 높은 금리로 빚을 갈아타야 하는 ‘리파이낸싱 리스크’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자 비용이 늘어나면 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고용을 축소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경기 침체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준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내리지만, 시장은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 공포 때문에 금리를 올리는, 정책과 시장의 괴리가 경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2025년 우리가 마주한 ‘나쁜 금리 상승‘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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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시장의 문법을 읽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
우리는 지금 과거의 경제학 공식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린스펀의 수수께끼가 ‘과잉 저축‘이 만든 저금리의 함정이었다면, 2025년의 역 수수께끼는 ‘과잉 부채‘가 만든 고금리의 늪입니다.
중앙은행만 쳐다보며 “금리 인하 = 채권 가격 상승“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투자에 접근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연준의 입뿐만 아니라, 미국 재무부의 국채 발행 계획표와 워싱턴 정가의 예산안 협상 과정을 더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합니다.
장기 금리의 상승 추세가 꺾이기 전까지는 듀레이션(만기)이 긴 자산에 대한 투자는 신중해야 합니다.
오히려 단기 채권이나 현금성 자산의 비중을 적절히 유지하며, 시장의 변동성을 방어하는 전략이 유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고금리 환경이 장기화될 경우 부채 비율이 높은 기업이나 부동산 리츠(REITs) 등의 자산이 받을 충격을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그 양상은 늘 다르게 나타납니다.
2005년의 교훈을 거울삼아 2025년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통찰력과 유연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입니다.
참고자료
[1] Bernanke, B. S. (2005). The Global Saving Glut and the U.S. Current Account Deficit. Federal Reserve Board. https://www.federalreserve.gov/boarddocs/speeches/2005/200503102/
[2] Project Syndicate (2025). What Role for the Bond Vigilantes? https://www.project-syndicate.org/magazine/bond-vigilantes-will-they-come-for-us-other-major-economies-by-j-bradford-delong-et-al-2025-03
[3] Indigo(2025). Economic Review – October 2025, https://indigoadvice.co.uk/economic-review-october-2025/
